[우정선행상] 제24회 우정선행상 본상 / 김형자 씨 이야기

202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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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선율로 세상을 물들이는 사람

봉사와 나눔을 44년간 실천해 온 

김형자 씨

 

 

 

 

사람은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목표는 저마다 다르지만,

행복함과 만족감을 추구한다는

그 목적만큼은 다르지 않다.

 

김형자(64) 씨 역시

오랫동안 성공을 꿈꿔왔다.

그래서 1분 1초를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남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말하는 성공의 주어(主語)가

그 자신이 아닌 ‘세상’이고

‘타인’이라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보다
조금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

 

“젊은 시절에 미국의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의 시 〈성공〉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어요.

 

제가 봉사를 하며 살게 된 계기가

바로 그 작품이에요.”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인해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 랠프 월도 에머슨의 시 〈성공〉 중

 

 

 


그의 첫 봉사는 대학교 2학년이던

1979년에 시작되었다.

 

신문을 보던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로원인

청운양로원이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때는 아르바이트하면서

학교에 다니던 때라 넉넉지 못했어요.

라면 한 상자랑 간식 이것저것 챙겨서

양로원에 매달 두 번씩 찾아갔죠.

 

얼마 안 지나서 서울시 동작구에 있던

아동양육시설 ‘신망원’에도 다니게 됐어요.

청운양로원과 똑같이 라면과

간식을 챙겨서 매달 두 번씩 찾아갔고,

가면 아이들 목욕도 시켜주곤 했죠.

 

신망원이 이사 간 후에도

다른 봉사에 집중하기 전까지

한 20년 정도 꾸준히 다녔어요.”

대학을 졸업한 후 출판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그는 과거의 자신을 어루만져 줄

운명 같은 봉사를 만났다.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한 건물

지하 1층에 자리 잡은 ‘상록수야학’에서

교사로 봉사를 시작한 것이다.

 

1985년에 시작한 야학 봉사는

1995년까지 10년을 이어갔고,

야학 봉사를 그만둔 후에는

서울시 노원구 월계주공아파트 노인정에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글 교육 봉사를 했다.

 

월계주공아파트는 임대아파트로

홀몸 어르신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만큼 배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도 많기 때문이었다.

 

1996년에 시작한 어르신

한글 교육 봉사는 2020년까지 이어갔다. 

 

 

 


나로 인해 한 명이라도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망원에서 봉사하던 중

우연히 지적장애인 거주시설

보담(舊 지게의집)과

씨엘의집을 알게 됐다.

 

그것을 계기로 1991년부터 보담과

씨엘의집을 찾아가 목욕 봉사와

급식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2003년부터는 공연 봉사도 시작하게 됐다. 

 

오랫동안 김형자 씨를 지켜본

‘씨엘의집(舊 은혜의집)’ 원장 유선영 씨는

그를 ‘끼가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김형자 씨와 봉사자분들이

공연하시는 날은 마을 축제 날이 됐어요.

 

사실 예전에는 마을 분들하고

교류할 기회가 전혀 없었어요.

근데 공연을 계기로 마을 분들이

시설에 마음을 열어주시더라고요.”

 

 

 


악기나 음향기기 등 공연에 필요한 것들은

직접 사 모았다.

 

그 크고 무거운 악기들을 싣고 나르기 위해

지난해까지 꼬박 20년 동안 커다란 승합차만

몰아야 했지만,

한 번도 불편하다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저 공연 봉사를 하면 신이 났고,

신이 나는 사람들을 보면 보람을 느꼈다. 

 

“처음 시작할 때는 7~8명이었는데,

점점 사람이 늘어서 인터넷에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카페도 개설하게 됐고, 
회원이 나중에는 500명도 넘어서

공연 봉사할 때 60~70명씩 모이고,

많으면 100명씩 모일 때도 있었어요.

 

저희 공연이 웬만한 프로 못지않게 멋있어요.

‘아름다운 동행’ 회원들이

같이 해주고 있어서 힘이 납니다.”

 

 

 


김형자 씨는 손이 크다.

넉넉지 못했을 대학 시절에도

빈손으로 봉사하러 간 적이 없었다.

 

요양원에 공연 봉사하러 갈 때도,

어르신들에게 한글 수업을 하러 갈 때도,

시설에 목욕 봉사나 급식 봉사를 하러 갈 때도

늘 그는 여러 보따리씩 간식을 챙겨 다닌다.

 

2000년부터는 홀몸 어르신들의

식사가 걱정되어 두 달에 한 번씩 쌀과

직접 만든 반찬을 여러 가정에 전달하고 있다.

 

나눔을 하는 곳이 많아 자주 가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라는 그.

 

그는 이미 그의 선율로 세상을 물들이고 있다.

 

그가 태어나기 전보다

훨씬 아름답고 조화로운 멜로디로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의 목표대로라면, 그는 이미 성공했고,

앞으로도 더 살기 좋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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