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 소설]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2018.04.05
공유하기

[초단편 소설]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장강명 작가,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그녀는 손목에 흉터가 있었다. 그녀는 그 상처를 과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리고 다니지도 않았다. 볼 테면 봐, 라는 식이었다. 타인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도 늘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할 테면 해, 라는.


나는 그런 초연한 태도에 사로잡혔고, 동시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녀는 나와 헤어지던 날 자신의 초능력을 고백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예지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게 아니야. 알게 된다는 거야. 책을 읽는 것에 가까워. 내가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이나 사물, 장소에 대해 불현듯 한 문장이 떠올라. 아, 이 사람은 곧 병에 걸리겠구나, 이 물건은 당분간 사람 손에 닿을 일이 없겠구나, 여기서 누가 다치겠구나, 그런 따위. 완벽하지는 않지. 왜,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는 알지 못하고 어느 한 조각만을 미리 알게 되는 거니까. 그런데 그게 너무 압도적이야. 의심조차 할 수가 없어.”


그녀는 자신의 삶이 그런 능력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미래의 어느 지점에서 일어날 일을 알게 된다는 것과 전체 미래를 본다는 것은 전혀 다르거든. 그런데 난 그 차이를 몰랐었어. 그 차이를 모르는 채, 모든 건 미리 결정돼 있고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빠졌지. 그래서 열의 없이 사는 데 익숙해졌어.”


그때 나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 덧붙였기 때문이다.


“너는 나와 다시는 만나지 못해.” 


그때는 그 말을 하기 위해서 그녀가 그 모든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몇 가지 미래를 더 말해 주었다. 내가 방송사에서 일하게 되고, 과로로 한 번, 교통사고로 한 번 입원하지만 금방 퇴원하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게 되고, 기록적인 강추위가 몰아치는 날 부다페스트에 있을 거라는 등의 이야기들이었다.



그 예언들은 이후 십 년 안에 모두 실현되었다. 내 인생도 어쩔 수 없이 그 사실에 영향을 받았다. 어떤 미래는 정해져 있고, 운명이라는 것은 존재했다.


손목에 흉터가 있는 그녀가 몰랐던 것은, 나 역시 초능력자라는 사실이었다.



내게는 천리안이 있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텅 빈 것 같은 때 어둠 속에서 불쑥 영상을 보곤 했다. 꼭 꿈을 꾸는 것 같았지만 꿈은 아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그 순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볼 수 있었다. 


석 달에 한 번 정도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내가 모르는 거리를 걷거나, 한인 마트에서 장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공항은 사흘째 한파로 결항이었다. 도나우강은 꽁꽁 얼어 있었다. 하늘은 푸른색에서 붉은색으로, 그리고 천천히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부다페스트의 금빛 야경은 호사로웠지만 어쩐지 가짜 같아 보이기도 했다.



촬영 팀은 술을 마시러 나갔고, 나는 조연출과 호텔 방에 있었다. 그녀는 나와 서로 다른 외주 업체 소속이었다. 우리가 일을 같이 하는 건 두 번째였다. 그녀가 출장지에서 내 방을 찾아온 것도 두 번째였다. 우리는 패딩을 입은 채로 이불을 덮고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아. 왜,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는 알지 못한 채로 남들 인생의 어느 한 조각을 짧게 훔쳐보는 거니까. 그런데 그게 너무 생생해.”


천리안에 대해 남에게 털어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조연출은 웃거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이야기할 때 그녀는 늘 그런 얼굴이었다.


“그런 능력 때문에 성격이 달라졌다고 생각해? 피곤할 때 원치 않는데도 다른 사람을 보게 되니까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을 더 찾게 된다든가. 옛 애인이 자꾸 보이니까 연애 전선에 문제가 생긴다든가.” 조연출이 물었다.


“그런 것 같진 않은데. CCTV를 보고 있다고 해서 그 화면 속 인물이랑 같이 있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잖아.”


말해 놓고 나니 거짓말이었다. CCTV를 보고 있으면 그 화면 속 인물의 부재감(不在感)을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런 감각은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나를 본 적도 있어?”


“아니, 없어. 누군가를 자주 생각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보이게 되는 건 아니야. 그 반대도 아니고. 그냥 무작위라고 생각해. 왜 하필 그 여자가 자주 보이는지는 모르겠어. 초능력자들끼리 뭔가 통하는 거 아닐까.”


“신경 쓰여? 옛 애인이 계속 보이는 게.”


“신경 쓰여.”


나는 정직하게 시인했다. 

“사실 나도 능력이 있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조연출이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기억 제거자’라고 주장했다. 


“<엑스맨> 영화에서 대머리 박사가 갖고 있던 능력 기억나? 키스하면서 여주인공의 기억을 지우잖아. 자기에 대한 기억만. 나도 다른 사람의 머리에서 특정 기억을 그렇게 지울 수 있어.”


나는 웃으며 그 영화가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라고 말해 준다. 그리고 그 영화에서 프로페서 X는 대머리가 되기 전이라고 지적한다.


조연출은 어깨를 으쓱하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내 능력도 완벽하지는 않아. 내 경우에는 상대가 협조해야 해. 상대가 자기 기억을 지우겠다고 동의해야 내가 그 기억을 지울 수 있어… 손목에 흉터가 있다는 그 사람 기억, 지우고 싶어?”


나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손목에 흉터가 있는 그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

그녀가 내게 미래를 알려 준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방송사를 다니게 됐을 때, 과로로 한 번, 교통사고로 한 번 입원했을 때, 매운 음식을 좋아하게 됐음을 알았을 때, 이곳에 와서 기록적인 한파를 마주했을 때, 나는 그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걸 원했던 걸까.


“그걸 원해?”


조연출이 묻는다.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키스해 줘.”


조연출이 말한다.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여기, 세계를 위험에 빠트리거나 구하지 않는,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의 소유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별하고, 추억하고, 사랑하는 데는 언제나 이런 초능력과도 같은 힘의 작용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장강명 작가는 서늘하고 냉철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문체로 다양한 계층의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한국의 자화상을 그리는 작가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출간작으로는 '댓글부대', '한국이 싫어서', '표백',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우리의 소원은 전쟁' 등이 있습니다.


▶ 더 많은 초단편 소설을 '판다플립'에서 만나보세요! ◀ 


본 소설의 내용은 코오롱 그룹의 공식적인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