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 소설] 오이 모독죄

201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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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편 소설] 오이 모독죄

김주욱 작가, 오이 모독죄

 


10년 만에 만기 출소하여 먹은 것은 자장면이었다. 예전에 살았던 동네를 다시 찾아갔다. 채소가게가 있었던 골목을 들어서자 양파를 볶는 냄새가 환풍기 사이로 퍼져 나왔다. 중국집은 대를 이어 영업하고 있었다. 이 집은 돼지비계를 볶아서 낸 기름으로 자장을 볶아 감칠맛이 있었다. 자장면 곱빼기를 시켰다. 면을 뒤덮은 자장 소스 위에 오이채가 한 젓가락 얹어 나왔다. 



자장 소스와 면을 섞는데 식은땀이 났다. 중국집 주인은 주문을 받고 배달음식을 랩으로 포장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슬그머니 오이채를 덜어내다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오이채를 자장면 밑에 깔고 고개를 숙이고 먹었다. 오이채를 안 먹은 것이 발각될까 봐, 아니 오이 냄새 때문에 자장면을 많이 남겼다. 


그들은 내 몸에 물을 끼얹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몽땅 젖었다. 몽롱한 상태에서 불빛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불빛은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스폿조명의 열기가 느껴졌다. 얼굴에 흐르는 찬물이 미지근해질 정도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의자에 묶여 있었다. 어느 사내가 오이를 방망이처럼 손에 쥐고 내 눈앞에서 흔들어 댔다. 오이의 가시돌기가 내 코를 할퀴었다. 나는 오이 모독죄로 구속되었다. 검사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편식증세가 있었으며 김밥을 먹을 때 오이를 빼버리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인을 확보했다. 



또 다른 증인은 내가 비빔밥을 먹기 전에 당근을 가려냈다며 오이뿐만이 아니라 채소혐오주의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채소를 혐오한다고 낙인찍은 것은 그들의 술책이었다. 친일매국노 가문이 3대째 오이농장을 크게 해오다 종합채소농장 사업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고문 기술자는 쟁반에 가득한 오이를 나무망치로 내리쳤다. 오이가 으깨질 때마다 비릿한 향이 내 코를 후벼 팠고 오이씨가 얼굴에 튀었다. 



고문 기술자는 내 머리를 뒤로 잡아당기고 입을 벌렸다. 또 한 명의 고문 기술자는 으깬 오이를 두 손으로 쥐어짰다. 쓰고 역겨운 오이즙이 목구멍으로 떨어졌다. 침과 섞인 오이즙이 입가로 흘러 내렸다. 오이 즙을 삼키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나는 오이를 무시하고 업신여겼던 행동을 자백하고 징역을 살았고 10년 만에 만기 출소했다. 왜 싫어하는 것을 거부하는데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가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던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전국에 지부를 두고 활동했지만 내가 구속당하는 모습을 보고 모두 뿔뿔이 사라졌다. 


고문 후유증으로 위암에 걸렸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오이즙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가 뒤틀리는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위를 절반이나 잘라냈지만, 전이는 멈추지 않았다. 의사는 3개월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했다. 병원에 누워 있으니 취직 못 해 빈둥거리는 손자가 병원에 자주 왔다. 녀석은 취직이 안 되는 이유가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한다. 연좌제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오이를 모독하는 것은 내란죄에 해당해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다. 



병원 식단에는 오이가 빠지지 않는다. 내 몸이 가뭄을 만난 오이처럼 말리 비틀어지고 숨 쉬는 것마저 힘들어졌을 때 손자 녀석이 인터넷에 뜬 기사를 읽어 줬다. 미국의 유전과학, 생물학, 정신분석학의 연구자들이 오이에 대한 거부반응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유전적으로 쓴맛 수용체를 혀에 가지고 태어나거나 예민한 후각을 가진 사람은 오이의 맛과 향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에선 오이가 싫다고 하면 개인적인 알레르기의 차원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손자 녀석은 미국이 그렇다면 다 해결되는 것이라며 좋아하면서 저녁 급식으로 나온 오이 샐러드에 레몬즙을 잔뜩 뿌린 다음 내 앞에서 맛있게 먹어 보인다.



「오이 모독죄」

오이 모독죄는 내란죄에 해당한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농담입니다. 오이를 싫어할 수 있는 자유. 어찌보면 우습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김주욱 작가는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한 장편소설 〈표절〉을 시작으로, 소설집 〈미노타우로스〉 중ㆍ단편 소설집〈허물〉을 펴냈습니다. 최근에는 그림에 이야기를 담아 소설에 이미지를 새기는 콜라보레이션 소설집 〈핑크 몬스터〉를 출간했습니다. 현실 문제에 등 돌리지 않고 우직하게 자기 걸음을 내딛는 소설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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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소설의 내용은 코오롱 그룹의 공식적인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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